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장편 소설이다. 大기레기 창궐 시대를 사는 현대인으로서 언론의 어두운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1992년 밀라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언급되는 기자들의 각종 기사 작성 수법은 2020년 대한민국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신문 도마니는 실제로는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다. 단지 누군가를 위협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왜, 누구를 위협하려는가? 상황은 이렇다.
발행인 콤멘다토레는 금융계 거물들의 소셜 모임에 들어가길 원한다. 흔히 말하는 '사회지도층' 엘리트 그룹 말이다. 콤멘다토레는 창간 예비판 신문을 이용해서 자신이 그들의 치부를 폭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럼 거물들은 신문 창간 준비를 방해할 것이고, 그는 신문 창간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들의 성역에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다.
이 도마니 프로젝트의 담당자는 시메이이다. 시메이는 신문 창간을 위해 주인공 콜론나를 비롯해 그저 그런 기자 5명을 고용한다. 시메이와 콜론나를 제외한 나머지 기자들은 이 신문의 정체에 대해 모른다. 그래서 실제로 창간될 신문이라고 생각하고 기사를 준비한다. 시메이와 콜론나의 역할은 기사들이 콤멘다토레의 목적에 부합하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시메이가 주관하는 업무 회의에서 기자들은 아이템을 찾고 어떻게 기사를 구성할지에 대해 논의한다. 이때 각종 방법들이 등장한다. 몇 가지 뽑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언적'으로 보도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독자들은 금방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악의적으로 사진을 이용한다. 해당 기사와 상관없는, 혹은 사실과 전혀 달라도 된다. 심지어 조작을 해도 된다.
- "아마"와 "어쩌면"이라는 말들을 넣어 예상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자. 간간이 정치인 이름도 들어가야 한다.
-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주장을 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한쪽은 진부한 의견을, 한쪽은 논리적이고 기자의 생각에 가까운 또 하나의 의견을 소개한다. 이러면 기자의 의견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 누군가 기사에 이의를 제기하면 논리적 반박 대신, 그 사람의 신뢰성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여 이의제기를 무력화시킨다.
- 발행인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나쁜 여론을 만든다.
- 전혀 다른 정보들을 교묘하게 엮어 의혹을 제기한다. 이때도 "아마도"란 표현을 활용한다.
- 감추고 싶은 사건 X가 벌어지면 신문은 그걸 안 다룰 수는 없다. 만약 이를 덮고 싶다면 동시에 더 자극적인 기사들을 내보낸다.
어째 어디서 다 들어본 내용들이다. 당연하다. 현재도 우리는 이렇게 생산된 기사들을 수없이 보니까 말이다. 직업윤리를 잃은 기자의 해로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것 같다.
사실 이 소설은 기자 중 한 명인 브라가도초가 무솔리니에 대한 음모론을 몰래 파헤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후 도마니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리고 시메이와 콜론나는 브라가도초의 음모론 취재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 그 음모론이 사실인지, 브라가도초는 정말로 그 취재를 거북해하는 높으신 분들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시메이와 콜론나도 정말 제거 타깃이 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진실의 행방은 묘연한 채 소설은 끝난다.
난 이 소설의 중심 이야기보다 시메이와 기자들의 회의 장면들이 더 인상 깊었다. 마침 바로 며칠 전에 읽었던 책이 '나쁜 뉴스의 나라(조윤호)'인 영향도 있다. 저널리즘 정신의 부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원래 세상은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편향된 정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정답도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회피할 수도 없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맞닥드려야 하는 고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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